어느 더운 여름 날, 상봉역 안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한 할머니와 손자가 전철역을 활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춘천에서 여행을 즐긴 후, 경의중앙선으로 갈아타 이촌역으로 내려갈 생각이었습니다. 길었던 여행인지라 짐이 많았으나, 아직 젊은 손자는 할머니의 짐까지 너끈히 들어드렸습니다.
갑자기, 손자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심각한 얼굴로 전화를 받던 손자는, 미안한 표정으로 할머니께 말씀드렸습니다.
"할머니.. 갑자기 회사에서 부르네요. 사장님이 갑자기 급한 일이 있다고, 지금 당장 회사로 오라 그러셔요. 이걸 어쩌죠?"
할머니는 잠시 당황했으나, 내 새끼가 먹고 살아 갈 월급을 주시는 감사한 분을 도와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가, 괜찮아. 얼른 건대입구로 가봐. 마침 7호선도 여기서 탈 수 있구먼. 짐은 늙은이한테 맡기고, 얼른 회사로 가."
손자는 할머니께 너무 죄송했지만, 아직 말단 사원이라 사장님의 부르심을 쉽사리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손자는 무거운 마음으로 할머니께 짐을 드리고, 본인의 짐을 든 채 7호선으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할머니는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경의중앙선 전철로 향했습니다.
전철은 다행히도 꽉 차 있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오후 시간대인지라 앉을 자리는 없었습니다.
그 때, 자리에 앉아 있던 한 정장 입은 남자가 할머니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이번 주에 하게 될 찬양 인도 콘티를 짜던 중이었습니다. 할머니의 짐을 보니 생각보다 무거워보여 좀 걱정이 되었습니다.
"할머니 힘드시겠네,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해드려야 하나."
그러나, 생각해보니 일어나게 되면 필기를 할 수가 없었고, 필기를 할 수 없으면 콘티를 짜기에 불편했기 때문에 그는 일단 계속 앉아있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즈음, 가슴 쪽에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strength, and with all thy mind"라고 써 있는 티를 입은 한 여자가 할머니를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중고등부 수련회를 마치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녀 또한 할머니를 보고 걱정했습니다. 그녀는 잠시 고민했습니다.
"자리를 비켜드려야 하나? 근데 어제 저녁 집회 끝나고 너무 늦게 자서 피곤한 걸.. 다른 사람이 비켜주지 않을까?"
그녀는 할머니를 못 본 체 하고, 핸드폰에 진동 알람을 맞춘 뒤 잠을 청했습니다.
여자가 잠을 청할 즈음, 팔에 무서운 문신을 한 아저씨가 할머니를 발견하였습니다. 아저씨는 여행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아저씨는 생각했습니다.
"와, 할머니 짐 X나게 크네. 저러고 집까지 갈 수 있나?"
아저씨는 바닥에 두었던 백팩을 매며, 할머니에게 다가갔습니다. 전철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한 건달이 할머니에게 돈을 빼앗으려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저씨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할머니, 저 자리 비었네요."
마음 착한 할머니는, 젊은이가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너무 고마웠으나 동시에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거절했습니다.
"젊은 총각이 앉아야지. 미안해서 어떡하누."
아저씨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에이, 할머니. 저는 곧 내려요. 그래서 일어난 거니까, 얼른 앉으세요."
할머니는 연신 미안하단 말을 반복하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자리에 앉으니, 그간의 피로를 몸이 이제서야 알기라도 한 듯,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저씨는, 졸음이 가득한 할머니의 표정을 보고 물었습니다.
"할머니, 어디서 내리시나?"
"이촌.. 이촌역 가유. 집이 이수역 근방이여."
"아이고 할머니, 나랑 같이 가시면 되겠네. 내가 깨워드릴테니까 얼른 주무세요."
할머니는 그 말을 듣고 갑자기 안심이 되었는지 몸에 긴장이 탁 풀렸습니다. 그러고는 그대로 잠에 들어버렸습니다. 팔에 문신이 가득한 아저씨는 잠든 할머니를 확인하고, 급하게 문자를 남겼습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좀 돌아갈 듯, 먼저 집 가있어. 대신 맛있는 거 사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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