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이 사람이 신학대학원생이 아니었다면, 또한 범행의 도구가 교회 복사기가 아니었다면, 기자와 이 기사를 읽는 사람들의 충격은 같았을까?
이 기사는 지극히 객관적으로 사실을 전달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기사를 보며 이렇게 느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자부하는 신학대학원생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쓰겠다고 산 컬러 프린터기를, 성매매를 위한 돈을 마련하는 데에 사용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이처럼 신학대학원을 다니지 않은 사람이어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 양심으로 하여금 고개가 끄덕여질 그것임을, 적어도 기사에 나온 행위를 가리키는 말은 아님을 안다. 그렇기에, 신학 근처에라도 가 본 우리의 행동은 중요하다. 우리가 그걸 모르는 것 처럼 행동해서야 되겠는가.
교회에서는 분명 칼라 프린터기를 선한 용도로 샀을 것이다. 프린터기로 프린트하는 인쇄물들로 인하여 복음(우리의 중심은 세상의 가치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지기를, 복음으로 이 세상이 물들여지기를 소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기사의 학생은 누구보다도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이 막중한 사람이다. 복음을 이 세상으로 물들이는 데에 앞장서야 할 사람이다.
그런데 도리어, 이 학생은 그런 프린터기를 이용하여 자신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닌 그릇된 쾌락에 두고자 하였다. 통탄할 일이다. 물론 인간된 몸으로서 그릇된 쾌락에 흔들리는 것은 죄된 본성이다. 그러나 , 그것을 이겨내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 맞다. 기껏 학교에서 악을 이기신 예수님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죄악에 마음을 주어버린 것이다.
이 학생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학생은 대유법일 뿐이다. 나는 어떤가? 욕심, 악의 공격으로부터 이기신 우리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도, 물질, 명예는 우리 삶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기준 되심을 듣고도 그렇게 살아내고 있는가? 생각 없이 이야기 하는 말 사이에서는 실은 돈을 많이 벌고 싶은 내면이 보이고, 실은 더 좋은 조건의 집안의 사람과 결혼하려는 내면이 보인다.
듣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복음은 듣기만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가지고 살아내는 것 또한 중요하다. 머무르는 복음은 의미가 없다. 필요한 곳으로 흘러보내지는 복음이 그것의 참 의미를 가진다. 나는 , 흘려보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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