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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미분류

두산 청소년 아트스쿨 - 박근형 연출가

1. 

예약할 때 고민을 많이 했다. 두산"청소년"아트스쿨이라니, 제목을 보기만 해도 미안했다. 눈치없이 끼는 느낌.그래도 예약 대상에 24살까지 있어서, 어떻게 어떻게 죄책감을 덜고 예약을 하게 되었다.

2. 

강연은 연강홀에서 이루어졌다. 사실 스페이스 111을 가보고 싶었다. 좋아하는 극단인 돌파구에서 작년인가 제작년인가에 한 연극 중 하나가 스페이스 111에서 했었는데, 사방이 관객석으로 둘러싸여있는 신기한 구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장에 와서 화살표를 따라가보니 연강홀이었다. 살짝 실망했으나, 참여할 수 있는게 기쁨이니.

3. 

연강홀은 아직 연극을 올리는 중이었던 것 같다. 커다란 서재와 각종 책들, 의학과 관련된 여러 포스터들, 약품. 무슨 작품일까 생각했더니 술과 눈물과 지킬앤하이드인 것 같다. 무대에서 사용하는 소품이 많기 때문에 차마 치우지 못 했구나. 뭔가 강연이라 하면 멀끔한 PPT와 강사만이 돋보이는 아주 깨끗한 배경이 떠오르는데, 이러한 상황도 그냥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치우지 못 한 배경이 더 진솔해보여서 좋았다. 이 강연과 그 연극 둘 다 결국 두산 아트센터의 역사 아니겠는가. 역사는 바꿀 수 없다. 강연을 위해 무대 소품을 다 치우는 것은 결국 이 곳에서 연극이 올려짐을 의식하지 않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이 곳에서 연극이 올려진다는 사실을 숨기는 건, 너무 멀끔하고 세련되었다. 반면 무대 소품을 치우지 않는 채로 강연을 진행한다면, 무대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네, 제가 바로 박근형 연출가님의 뒷배경 담당입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이따가는 술과 눈물과 지킬앤하이드의 뒷배경도 겸할거예요. 좀 이질적으로 느껴질려나요? 원래 그런 곳인걸요. 공연도 하고, 강연도 하는 그런 곳. 그런 곳에서 지금 강연을 듣고 계신 거예요."

4. 

사실 구미가 제일 당겼던 이유는, 박근형 연출가님이 화제의 검열작,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의 장본인이시기 때문이다. 대체 어떤 분이길래, 윗 분들이 두려워하는 그런 작품을 내놓으셨을까? 예리하실까? 무서우실까? 그럼 청소년들에게도 촌철살인, 쓴 소리를 하시려나? 뭐, 이런 것들이 참 궁금해서 고민도 없이 예약을 했다.
그런데 왠걸, 정말 소탈하신 분이셨다. 자신을 꾸미거나 드러내려는 것 없이, 그냥 이야기하라니까 이야기해주시고, 부탁드리니까 이야기해주시고. 도리어 관객들의 고민에 대해서 이야기하실 때는 정말 그 사람을 위해 솔직하게 답변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솔직한 분이셨다.
어쩌면, 윗 분들이 그렇게 두려워하신 것은 이런 솔직함일 수도 있겠다. 이 사회에 대해서 어떤 필터도 없이, 그저 느낀 대로 표현한 것이 곧 그들이 드러내고 싶지 않아하는 그것이기 때문에.


5. 

살아오신 이야기를 하는 시간에는, 어떤 극적인 요소도 없이 솔직하게 본인의 삶을 이야기하셨다. 어떤 자랑도 없이. 인기가 많던 작품에 관하여서는, "사람들이 좋아하더라구요." 정도로만 표현하셨고, 화제가 많던 작품에 관하여서는, "사람들이 신기해 하더라구요." 정도로만 표현하셨다. 내 화법이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는데, 내 삶이야 그냥 그렇고 대단한 뭐를 이뤄낸 것도 없기 때문에 잃을게 없어서 정말 저렇게 말하는 것이지만 박근형 연출가님처럼 많은 인정을 받으신 분이 저렇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존경스러운 일이다.

6. 

연출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냐는 질문이었던 것 같다. 어떻게 배우와 스탭과 잘 이뤄낼 수 있을까, 뭐 이런 거였던 것 같기도 하고. 여기에 대하여 연출가님은 이렇게 답변하셨다.
"연출가는, 하는 게 없어요. (객석 빵터짐)
아니, 여러분들이 오해할까봐 그러는데 나 원래 겸손하거나 그런 사람 아니예요. 그런데 진짜 하는 거 없어요. 연출가가 뭘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은 오산이에요. 그냥 팀원들 하나하나 신경써주고, 차비는 있는지 물어봐주고, 힘든 건 없는지 물어봐주고..
이 장면에서 어떻게 할까? 라고 내뱉으면, 배우랑 스탭들이 더 좋은 의견을 제시해요. 그 의견을 취합시키는 것이 굳이 역할이라고 하면 역할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기억이 왜곡된 것에 따라 약간의 각색 있음.)
사실 연출하면 뭔가 영상미, 미적인 감각 등을 생각했다. 그런데, 박근형 연출가님의 생각만일 수도 있겠으나 오늘 들었을 때는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 연출가는 NSM 전체리더, 그리고 아이들을 맡은 선생님과도 똑같은 역할을 하는구나. 많이 들었던 이야기를, 그리고 많이 고민했던 이야기를 예상치 못 한 곳에서 들으니 편안함에 불안하면서도 공감이 되었다.

7. 

질문에 대한 답변이 하나하나 다 인상적이었다. (기억이 왜곡된 것에 따라 약간의 각색 있음.)

Q. 미래의 연출가, 혹은 극작가(혹은 둘 다 공통으로)를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으신가요?
A. 추천하는 책은 없어요.. 제가 책을 잘 안읽어서..(객석 빵터짐)
음.. 그냥 알아서 좋아하는 책을 좀 읽으세요. 좋아하는 책을 읽게 되면 다음 책, 아니 다음 이야기에 관한 실마리가 생겨요. 그렇게 다음 이야기를 접하다 보면 이 영화도 보고 싶고, 저 곳도 가보고 싶고 그런거예요. 그런데 뉴스는 꼭 보았으면 좋겠어요.
기술적으로 실력을 향상시키는데에 추천하고 싶은 책이야 있지요. 하지만 그거랑은 별개라고 생각해요.
(두서없이 딴 얘기로 넘어감) 요새 연극하겠다는 청년들 보면 그냥 좋은 기술자들 같아요. 사회가 그런 기술자를 양산시키는 것 같기도 하고. 근데 기술적인 면보다는 뭐랄까.. 그냥 멋진 청년이 없어요. 그래서 기술적 소양 보다는 본인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싶어 하는지를 잘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내 질문이었는데, 요새 책을 찾아보는 것에 빠져있어서 혹시 재미있는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던진 질문이었다. 난 전공이 아니니까 그런 책들을 하나하나 쌓아갈 때 마다 뭔가 조금씩 스펙이 쌓이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대 얻어맞은 기분.)

Q. 현재 시대랑은 좀 다른 시대를 사셨는데,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부럽게 느껴지는 것도 있다. 그 당시에는 신문에 극단 공고를 낼 정도였으나(연출님은 신문을 보고 들어간 극단에 사람이 없어서 제일 부족한 배우부터 시작했다고 하심.) 현재는 연극을 지망하는 학생 중에 열정 없는 친구가 없고, 모두가 엄청난 열정을 소지하고 있다, 이런 살짝 달라진 세태에서, 정말 현실적으로 미래의 연출가들이 좀 더 지녀야 할 능력이나, 준비해야 할 소양이 있을까.

A. 연출가님이 한 30초정도 질문을 곱씹으시다가 답변하셨다.
"음.. 준비해야 하기 보다 좀 덜었으면 하는 걸 말하고 싶네. 사실 저는 아까 말씀드린 것 처럼 글쓰기나 연출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요. 그냥 극단에서 뒹굴고, 그러다보니까 친구들이랑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긴거지. 요새 연극하는, 희곡 쓰고 연출하는 친구들 보면 진짜 박학다식하고 많이 알아요. 근데 좀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요새 좋은 작품들 많이 나오고 그러는데, 정작 극을 보면 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느껴지기 보다는 문장이 수려하고, 무대가 화려하고 막 그래요. 연출하는 친구들도 보면 무슨 인테리어 연구하는 사람 같아. 어떤 극을 봤는데, 대사가 그냥 주옥같아요. 근데, 제일 와닿는 대사는 시장 바닥의 그 말이예요. 우리가 항상 쓰는 그 말. 무대만 해도, 연극의 장점은 상상력이에요. 배우가 "지금은 추운 겨울."하면 겨울인거예요. (강연장은 공연 중이었어서 무대 소품으로 차있었는데) 이런 소품들.. 멋있긴 해요. 근데, 무대 없이도 공연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얼마나 더 멋있게 보여주고, 화려하게 꾸밀까보다는 어떤 이야기를 들고 올까를 더 고민하면 좋을 것 같아요. "


Q. 연출가님, 아픔이 있고 상처가 있는데 거기에 집착하게 되는 사람에게는 무슨 말을 해주시겠습니까?

A. 음.. 사실 이런건 술 마시면서 이야기 해야하는데..(객석 빵터짐)
근데 제가 뭐라 해줄 수가 없어요. 저도 그런 인간이거든. 다만, "왜 나는 저런게 없을까?"라는 빈자리나 아픔은, 그냥 둬도 자양분이 되는 날이 오더라구요. 내가 그렇듯이, 그들도 그래요.


8. 

이야기의 내용이 중요하지,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셨다.
누군가가 말했는데,
"어떤 연극은 메시지를 보느라 형식이 관심 밖일 때도 있고
어떤 연극은 메시지와 도시에 형식에 마음을 뺏기게 되고
어떤 연극은 메시지도, 형식도 보잘 것 없어서 하품이 나온다.
그러나, 형식이 좋아 메시지의 호불호를 무시하게 되는 경우는 없는 것 같다."
뭐 이 말이 생각났다.
이 분이 진짜 사람을 사랑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다 이야기를 갖고 있으니까.

9. 

직업에 관한 이야기, 앞으로 연극계에 대한 전망 뭐 이런 걸 들을 수 있나 싶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냥 박근형 연출가님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더 좋은 것 같다. 한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작품은, 참여하는 사람들을 비연속적으로 볼 수 밖에 없는데,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완전히는 아니어도) 비교적 연속적으로 관찰할 수 있으니.


그리고 이에 대해선, 두산아트센터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더 체계적으로, 계획적으로 강연을 진행하려면 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뭐도 받고, 뭐도 부탁드리고 했을 텐데, 전혀 그러지 않음이 느껴졌다. 박근형 연출가님은 두서없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꾸밈없음이 오히려 더 와닿았다. 오히려 형식을 잡고 체계적으로 강의가 이루어졌다면, 준비한 것을 뱉어내느라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못 들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정말 온전히 강연자에 맞는 강의였다.

아 참, 참고로 강연제목은 "세상에 가치없는 인생이 있을까?"였다. 연출가님께선 제목을 소개하시고는, "주제가 너무 진부하죠?"라면서 멋쩍어하셨다. 그러나, 이토록 진부해보이는 질문도, 그에 맞는 정해져있는 답도 제대로 살아내지 못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진부하기는요, 제일 핫한 핫이슈입니다.